장보러 왔던 아줌마들...

장보러 왔던 아줌마들, 시장안 카바레서 춤바람… 반찬가게 간판 웬 서양화

사석원

66대65. 뒤지고 있다. 종료 10초 전. 1967년 체코 세계여자농구 선수권대회 2차전. 상대는 주최국 체코. 1차전에서 예상외로 이탈리아를 꺾은 한국. 그러나 2차전은 패색이 짙었다. 공격권도 체코. 에이스 박신자마저 5반칙으로 퇴장. 그때 주희봉이 체코선수의 공을 번개같이 가로채고는 곧바로 골밑에 있는 김추자에게 롱패스. 단신의 김추자는 체코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슛. 동시에 종료음이 울렸다. 골인! 거짓말 같은, 기적 같은 역전승이다. 모든 한국선수들은 얼싸안고 코트에 뒹굴며 엉엉 울었다. 이어서 동독, 일본, 유고도 연파하고 결국 소련에 이어 준우승.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메달을 딴 것이다. 우승팀이 아닌데도 박신자는 대회 MVP로 뽑혔다.

귀국 후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다. 역사상 최초의 카퍼레이드도 있었다. 며칠 후 광장시장에서는 별도의 환영식이 열렸다. 광장주식회사의 김철환 전무가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김 전무의 대표팀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거기에 감복한 광장시장 상인들도 합세하여 여자농구대표팀을 딸같이 후원했다. 유니폼도 변변치 못한 시절이었는데 힘내라며 상인회별로 정장, 한복, 평상복, 운동복들을 최고급으로 선물했다. 잘 먹어야 된다며 툭하면 광장식당으로 초대해 영양식을 대접했다. 뿐만 아니라 연습경기 때면 조를 편성해 어김없이 찾아가 목이 터져라 응원했으니 여자대표팀이 부모, 형제들을 찾듯이 광장시장을 찾아온 것은 당연했다. 시장 상인들과 부둥켜안고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같이 흘렸었다.

1905년에 개설된 107년이라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의 광장시장은 밝은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씨름꾼으로서 처가살이로 빙빙 떠돌던 이정재는 같은 고향 출신인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종로 4가에서 6가에 이르는 동대문 일대의 상권을 모두 쥐게 된다. 정치권의 절대적 비호 아래 전쟁 때 전소된 광장시장을 싹 밀어버리고 1959년 이정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광장시장을 재건하여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분양금을 받아 폭리를 취했다. 또한 과도한 관리비를 착취하여 원성을 듣다가 결국은 5·16 혁명 후 그의 오른팔 임화수와 함께 처형당했다. 

“어휴 그때는 말도 못하게 바빴죠! 군대에 있을 때도 외출, 외박 나오면 여기 와서 일하다 들어갔어요.” 광장시장의 양복점인 ‘천일라사’ 우종범 대표의 얘기다. 그는 이 양복점에서만 41년째 재직 중이다. 의리의 사나이다.

70, 80년대엔 가게가 지금보단 여덟배가량 컸었다며 우 대표는 그때를 회상한다. “광장시장 3층에 있던 ‘광장캬바레’도 엄청나게 성황을 이뤘어요. 시장바구니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춤바람난 아줌마들이 버글버글 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화류계에서 놀아본 사람들은 ‘광장캬바레’를 다 안다. 무려 4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장안 최고의 카바레였었기 때문. 그러나 강남에 최신 무도장들이 연이어 생기면서 명성이 흔들거리더니 결국 IMF를 맞아 문을 닫았다. 천일라사의 창업자인 개성상인 이희용 씨는 올 4월,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지금은 우 대표 혼자서 사장, 경리, 청소 모두 손수 하고 있다.

그런데 양복점에 있는 직물 때깔이 남다르다. 이탈리아제 ‘로로피아나’란 천이라는데 참 좋다. 이리도 부드러울 수가! 20년 전만 해도 영국제를 알아줬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천을 최고로 친다며 안 맞춰도 좋으니 일단 치수를 재자며 줄자를 들이댄다. 얼떨결에 양복치수를 쟀다. 로로피아나로 하면 양복 정장 한 벌이 85만 원, 캐시미어 코트는 150만 원이고 제일모직은 55만 원이란다. “백화점은 네, 다섯 배나 비싸요.” 달짝지근한 말로 나를 꼬드긴다. 마음이 심란하다. 그런데 왠지 넘어가고 싶다. 아니 이미 난 넘어갔다. 사실 양복을 맞춰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결혼할 때 한 벌 해 입고는 그게 끝이었다. 정장을 입을 일이 없었다. 그날 난 이십 몇 년 만에 신사복을 맞췄다. 최고급으로…. 7일 후에 가봉하고 그로부터 보름 후에 찾아가란다. 후회 반, 기대 반이다. 에이, 믿어보자! 우 대표가 잘 가라고 나에게 90도로 절을 한다.  

우리나라 5대 재벌집의 식탁에 오를 생선을 모두 공급한다는 ‘대원상회’, 우리집 어른이 40년 넘게 민어회를 주문하는 ‘영관상회’도 광장시장에 아직 그대로 있다. 요즘 광장시장의 대세인 ‘마약김밥’ 분점으로 늘어선 줄도 대단하다. 우리 딸아이가 마른 굴비살 찢어 놓은 걸 좋아하는데 건어물 가게인 ‘한진상회’에서 꼭 구입한다. 그 집 주인 아줌마가 아주 싹싹하고 물건도 실망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봉지가 3만 원, 큰 봉지가 6만 원. 녹찻물에 얼음 몇 개 넣고 밥을 말아 마른 굴비살과 먹으면 진미다. 오늘은 재래김 한 뭉치도 샀다. 1만 원. 인사하고 나가면서 “송이는 없어요?”라고 묻자 “송이는 ‘홍림’에 가야죠” 한다. 그러면서 나를 직접 반찬가게인 홍림에 데려다 주었다. ‘홍림(洪林)’ 특이한 이름이다. 송이가 좋았다. 올해는 9년 만의 풍작이란다. 그래도 중국산으로 샀다. 값이 싸기에 그랬다. 1㎏에 15만 원. 아주 실하다. 모양은 좀 남사스럽다. 간장게장이 무척이나 맛있어 보인다. 1㎏에 4만 원. 그것도 샀다. 선비 같은 모습의 사장님께 홍림이 무슨 뜻이냐 묻자 어머니 성인 ‘홍’자와 자신의 성인 ‘임’자를 합한 것이며 그것으로 인감도장도 새겼다고 유래를 친절히 설명해 주신다. 효자시다. 오죽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면 그렇게 지었을까. 이 집도 역사가 무려 60년. 그런데 간판엔 서양화 한 점이 새겨져 있다. 무슨 그림이냐고 묻자 자신의 아버지 그림이란다. 누구실까? 바로 근대미술의 선각자 ‘임군홍(1912∼1979)’ 선생. 깜짝 놀랐다. 임군홍 선생의 아드님이시라니. 선생은 양화의 개척자지만 한국전쟁 때 납북되는 바람에 우리 미술사에서 지워졌다가 최근에서야 비로소 재조명받고 있다. 올해가 탄생 100주년. 무려 80점이나 되는 유작을 모진 세월을 견디며 소장하고 계시지만 탄생기념 전시회가 없어 괜히 나까지 송구스럽다. 자존심이 강한 임군홍 선생은 순전히 독학으로 서양화를 익혔다. 다양한 소재를 섭렵했었고 특히 인물화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홍림의 임덕진 사장은 임군홍 선생의 둘째 아드님으로 세 살 때 아버지가 납북되어 얼굴은 기억 못한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유작과 유품을 빠짐없이 잘 보관하고 있었다. 무용가 최승희를 그린 철도청 달력에 관한 비화와 그때 최승희의 모습을 찍은 진품사진을 지금도 갖고 있노라며 힘주어 말할 때는 그가 얼마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은 서울에서만 700년을 산 서울 토박이. 사실 나도 그렇다. 말을 나누다 보니 어이쿠, 고등학교 12년 선배님이시다. 세상이 좁다. 일본손님들이 계속 몰려와 할 수 없이 인사를 하고 아쉽게 가게를 나왔다.

광장시장 좌판주점들은 손님들로 북적인다. 걸어가기가 힘들 정도다. 50년 경력의 ‘기철이네’ 사장님은 기철이가 낼모레면 쉰 살이 되는데도 장가를 못 가 걱정이 태산이라며 팔뚝만 한 아바이 순대를 성큼성큼 썰어 손님에게 내준다. 한양공대 전기과 65학번인 ‘할머니집’의 2대 사장님은 선을 무려 50번도 넘게 본 끝에 사모님을 만나 결혼하셨다. 결혼 참 잘하셨다. 솜씨 좋은 사모님 덕분에 할머니집 순댓국, 머릿고기는 광장시장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오세훈 씨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 이곳서 그와 난 머릿고기에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는 서울시장을 그만두었다. 정치는 참으로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몇 년 전 쓰러져 한참을 고생했던 ‘회 원조집’ 사장님은 지난 7월에 또 쓰러지셨다. 다행히 겨우 일어나 지금도 장사를 하시지만 2년 후엔 50년 넘게 일했던 시장을 떠나신단다. 아드님이 말린다며…. 끝까지 자식 사랑이시다.

58년 개띠 ‘오순네’ 사장 박오순 씨는 서울야고(공부는 안 하고 달밤에 체조 했단다)를 졸업하고 잠깐 회사를 다녔다. 퇴직 후 퇴직금으로 기차여행 하다 기차 안에서 남편을 만났다. 곧바로 눈이 맞아 부리나케 배를 맞대고 산 지도 어언 31년. 그래도 그녀의 남편 사랑은 변함이 없다. 신혼 때 연탄가스 마신 후유증으로 지금껏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오순네. 2남8녀 중 다섯 번째 딸이라 오순네고 윗언니인 박사순 씨는 바로 옆에서 ‘사순네’란 상호로 장사하고 있다. 이순이 언니는 광장시장 근처에서 단란주점 하다 망해 놀고 있고 막내는 전북 새만금교회 목사사모님. 고향인 부안에서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친정엄마께 추석 때 컵라면 다섯 박스와 돈 20만 원을 보냈다고 한다. 오순네 바깥선생은 철학원의 철학자시다. 난 지난해 대보름날 오순네에서 왕년의 대배우 ‘문희’ 선생과 오색나물에 빈대떡으로 진하게 한잔했다. 그녀는 전성기 때엔 ‘경국지색’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녀의 소탈한 성품과 식성에 놀랐다. 1947년생으로 65년 이만희 감독의 ‘흑맥’으로 데뷔하여 270편쯤의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소탈한 성격과 식성은 주로 트럭으로 이동하고 허름한 숙소에서 생활했던 경험 때문이라는데 그녀가 출연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항상 붐비는 구제품 점포들과 대조적으로 늘 한산한 곳이 한복상가. 우리나라를 뜻하는 ‘한(韓)’자 를 쓰는 한복, 한식, 한옥, 한지 등은 전국의 종합대학교에 학과가 개설된 곳이 없다. 참 희한한 나라다. 남의 것만 가르친다. 얼마 전 부산영화제 개막할 때 보니 여배우들이 온통 속살만 더 보여주려 안달할 뿐 귀품 있는 우리옷을 입고 나온 배우는 보질 못했다. 어쩌다가 이 정도로 천박하게 됐는지. 광장시장 2층의 수많은 한복점들이 참으로 걱정된다. 20년 후, 30년 후에 우리옷 만드는 장인들이 과연 그때도 남아 있을까. 만약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그건 비천한 상놈의 나라다.

광장주식회사 송호식 회장은 전형적인 서울양반. KS 출신답지 않게 나서길 싫어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태도와 온화한 성품은 회사 운영방식 역시 마찬가지인 듯. 공허한 언행보단 책임과 믿음이 절대적인 분위기다. 김학석 사장도 49년이나 근속했다. 놀라울 뿐이다. 송 회장은 섣부른 변화를 극도로 경계한다. 자신의 역할은 시장의 원형을 잘 보존해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것뿐이란다. 다양한 입장의 상인들에게 회사를 맡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봉직했다. 진실한 교감의 결과다. 사실 이곳을 재개발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은 금전적 이득이 생기겠지만 송 회장은 단호하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다.

광장주식회사 입구 좌판주점의 안경 낀 사장님은 3개월 전에 갑상선 수술을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친구 두 분이 대신 가게를 운영한다. 항정살 직화구이가 이 집의 별미. 소주 한 잔 따르며 공상에 젖어본다. 이웃나라 일본엔 1400년 역사의 회사가 있다. 일부러 찾아가 확인도 했다. 그런데 국내서 제일 오래됐다는 광장시장은 이제 겨우 백여 년. 우리도 오백 년,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자랑스러운 전통시장을 만들 순 없을까. 어쩌면 송 회장도 그런 꿈을 꿀는지 모르겠다. 수백 년 후, 광장시장에서 만든 한복을 입고 우주 자가용을 타고 장보러 다니는 상상. 유네스코지정 인류문화유산 ‘광장시장’. 소주가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