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
살아가면서 가지 않아 본 길을 가려 할 때 등대 같은 존재가 항상 있게 마련. 인생에 있어서 저절로 스스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먹고 말하고 입고 쓰는 것 등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행위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좋은 인생이란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나쁜 인생이란 나쁜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노는 것, 잘 노는 것은 지극히 내 일생일대의 최고 과제다. 그리하여 만약 훗날 내 묘비명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건 당연히 ‘잘 놀다 간다’일 것이다. 그리고 한 줄 더 쓴다면 ‘고맙다! 같이 놀아줘서…’다. 이십 년 전쯤, 내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르고 마구잡이로 놀 때 강력한 빛이 되어준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기꺼이 화류계의 대선배로서 한량의 도를 전수해 주신 것이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한량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을 우리는 신 전무님이라고 불렀다. 전무라 함은 회사의 직함이나 그분은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특별한 직업은 없으셨다. 그저 편의상 그렇게 불렀는데 아마 예전엔 직장에서 전무의 직함으로 일하셨던 것 같다. 신 전무님은 나보다 이십 년 가까이 연상이시다. 고향이 부산이었지만 일찍부터 서울에서 한량의 도를 익히셨다고 한다. 천성이 순수하면서 인간미가 걸쭉하고 화류계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탓에 그분을 따라 풍류를 즐기는 이가 꽤 됐고 나도 그 무리 중의 한 명이었다. 사제의 결의를 맺고 강호의 풍류 명소를 찾아 유람과 연회를 반복했다. 덕분에 조금씩 풍류에 눈을 뜨게 됐다. 그리하여 풍류도인 신 전무님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한량의 도를 전수받게 됐다. 비록 아직도 하수의 수준이지만.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하면 우린 일단 화가들의 성지 인사동에서 만나 을지로로 자리를 옮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을지로엔 알려진, 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맛집들이 즐비했다. 역사가 수십 년이나 된 국보급 식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대한민국 최고의 식탐로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심할 정도로 무지한 나는 그때까지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인생의 급수가 참담하리만큼 초라한 수준이었다. 신 전무님은 평생을 걸쳐 터득한 풍류에 관한 지식과 지혜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셨다.
한량수업은 먹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좋은 음식을 좋은 식당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 좋은 사람과 맛있게 먹는 것인데 그 수업은 늘 을지로에서 이뤄졌다. 식당명가가 을지로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름 진지하게 탐식을 반복했다.
보통 을지로에서 2, 3차 정도 술과 식사를 한 다음 다시 청계천을 건너고 종로를 거쳐 낙원동으로 진출하곤 했다. 신 전무님이 좋아하는 무도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허리우드극장 1층에 있는 ‘123캬바레’를 주로 갔었다. 그런데 본시 나는 먹고 마시는 취미는 유아 때부터 갖고 있었다. 초음(初飮)의 경험도 이른 편이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화실선생님을 따라 니나노 방석집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무는 영 소질도 없고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무도장에선 그저 멍하니 자리만 지키기 일쑤였다. 지금도 가무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는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번’ 오직 한 곡뿐이다. 줄잡아 5, 6천 번은 부른 것 같다. 그리하여 결국 한량수업은 2, 3년 계속되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때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을지로의 국보급 식당들을 떠올리며 맛있었던 한량수업의 추억을 회상하려 한다.
우리가 1차로 가장 많이 간 곳은 ‘조선옥’이란 을지로3가에 있는 갈비집이다. 우리나라 소갈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집의 역사가 무려 60년도 넘었다. 그러다 보니 시설은 낡고 어두컴컴하다. 삼박하고 깔끔한 곳은 아니다. 시라소니나 김두한도 단골이었다는데 물론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들도 한량의 끼가 다분했을 것이다.
양념갈비를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할아버지가 연탄불로 구워서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할아버진 조선옥의 사장님이 아니고 이 집의 주방장으로서만 50여 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뚝심이다. 한 직장에서만 그리도 오랜 세월을 재직하고 계신다는 것이 요즘의 세태완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손님으로 자주 왔다는 협객 김두한과 시라소니만 의리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달짝지근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참 맛깔나다. 옛날식의 크기가 작은 하모니카 갈비라고 하던데 자꾸만 먹힌다. 전부 넓적한 갈비뼈가 붙어 있어 두 손으로 뼈를 잡고 갈빗살을 앞니로 뜯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난 주로 소주를 마셨지만 사부님은 맥주만 드셨다. 젊은 시절에 너무 과음을 하셔서 독주는 몸에 무리가 간다며 사양하셨다. 풍류수업은 당연히 주도수련(酒道修鍊)이 포함됐는데 첫째 잔, 둘째 잔, 셋째 잔까지의 술잔을 가급적 천천히 마실 것을 당부하셨고 이유는 그래야만 오랜 시간 음주를 해도 급하게 취하지 않고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도라지무침도 별미였는데 희한하게 소갈비랑 궁합이 잘 맞았다. 또 그 집의 메뉴 중엔 대구탕이 있었다. 그러나 생선 대구가 아니고 보신탕을 대신하는 갈빗살탕이다. 일종의 육계장인데 우린 절대 그런 건 안 먹고 갈비만 뜯었다. 돈은 쥐뿔도 없었지만 입맛은 최고만 찾았다. 그러곤 배를 완전히 채우지 않고 근처에 있는 ‘을지면옥’으로 단호하게 자리를 옮겼다. 갈비 뒤엔 물냉면이 제격이고 그중 을지면옥 육수 맛이 최고라는 믿음에 사부님은 반드시 을지면옥 물냉면만 고집하셨다.
사부이신 신 전문님은 특이한 방법으로 물냉면을 드신다. 삶은 계란 반쪽이 냉면 고명으로 딸려 나오는데 계란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정성껏 으깨서 국물과 잘 섞는다. 그래야만 국물빛이 약간 노르스름해지며 빛깔도 곱고 고소한 맛이 살짝 더해져 더욱 맛있어진단다. 그리고 식초나 겨자는 아주 살짝만 넣는다. 식초 듬뿍 넣는 이들을 무식하다며 경멸한다. 면을 먹기 전에 의식을 치르듯이 두 손으로 그릇을 받치고 경건한 자세로 우선 육수부터 두어 모금 꿀꺽꿀꺽 삼킨다. 아 그 맛이란, 뭐라 표현키 어려운 참으로 오묘한 맛. 갈비 먹은 뒤의 느끼한 입맛을 단숨에 가시게 하는 시원한 맛이다. 그 첫 모금의 짜릿함은 오직 을지면옥 냉면만이 낼 수 있는 황홀한 경험이다. 당연히 을지면옥 냉면 맛에 중독되었다. 그건 순전히 사부님의 영향이다. 한번 굳어진 입맛은 잘 안 변한다. 가끔은 아마 대한민국 냉면집에서 대중적으론 가장 유명할 것 같은 우래옥(1946년 개업)도 가고 꿩냉면으로 유명한 평래옥도 가고 동치미 육수 맛이 일품인 남포면옥도 갔지만 그건 다른 냉면도 맛보고 싶다는 제자들의 투정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 신전무파는 을지면옥의 광신도가 되고 말았다.
을지면옥 입구는 아주 작고 좁아 찾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면 새 둥지처럼 넓고 아늑하다. 2층까지 있다. 냉면 맛도 일품이지만 바쁜 시간이나 한가한 시간이나 똑같이 차별 않고 쿨하게 손님을 받는 태도가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이다. 때론 귀한 육수를 거저 듬뿍 포장해 주신다. 집에서 국수를 삶아 말아 먹으면 맛있다고. 이런 명가의 후덕함이 참으로 망극했다.
‘우래옥’ 냉면은 고집스럽고 세련된 맛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김치말이란 메뉴를 더 좋아한다. 육수에 물김치를 섞고 참기름 몇 방울 뿌리고 면 밑에 찬밥을 깐 독특한 메뉴인데 칼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해장으로는 그만이다. 그것도 신 전무님이 알려주신 정보였다. 우래옥에서 20년간 냉면을 만드셨던 냉면명장 김태원(74) 씨는 육수 만드는 재료에 대해서 밝힌 적이 있다. 쇠고기, 돼지고기, 노계(老鷄), 감초, 생강, 파, 양파 등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노계다. 영계가 아니고 노계란다. 뭘 모르는 하수들이 영계를 찾는다. 역시 명장답게 그분은 고수시다. 사부님도 자주 노계의 재발견이란 주제로 강의를 설파하셨던 기억이 있다.
냉면 좋아하는 이들은 서로 자기가 가는 단골 냉면집이 낫다며 자존심을 걸고 핏대 올리며 본인의 단골집을 옹호한다. 평양냉면이란 게 사실 묘한 맛이라서 처음 먹어본 이들은 그 진수를 알아채긴 어렵다. 그저 밍밍하다고 할 것이고 이 심심한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아해하기 일쑤다. 여러 번 맛을 보고 예민하게 미감을 훈련한 뒤에야 비로소 평양냉면 맛의 진미를 알게 되는데 이때 자기 입맛이 더 뛰어남을 어떡하든 증명하고픈 심리가 있다. 어쨌든 우린 그렇게 조선옥 양념갈비와 을지면옥 물냉면과의 환상의 궁합을 몇 년간 즐겼던 맛있는 기억이 있다.
그뿐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단골집 ‘부민옥’과 김대중 대통령의 단골집 ‘양미옥’ 역시 우리들의 단골집이었다. 부민옥 양무침을 안주 삼아 술도 꽤나 마셨다. 또 빠트릴 수 없는 식당이 을지로의 최고참 ‘용금옥’이었고, 80세나 된 최고령의 서울식 추탕집이다. 롯데호텔 건너 을지로 입구 다동의 뒷골목에 있는 용금옥은 80년 세월을 찌그러진 낡은 한옥에서 겨우 버티고 서있다. 신 전무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것 같다. 그전까지 나는 추탕 맛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추탕은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아는 맛이다. 애들은 그 맛을 모른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 때마다 추탕 맛의 묘미를 알게 된다. 골뱅이골목 ‘영락골뱅이’의 자학하며 먹는 매운맛을 즐기기도 했다. 어찌도 그리 매울까. 눈물, 콧물에 범벅이 된 채 헐떡거리며 매워서 얼얼해진 입 안을 맥주로 부시며 한량수업을 성실히 이행했다.
당시 한량수업엔 많은 비용이 필요했는데 전액을 청기와화방 조 사장님이 대셨다. 난 가난한 초보화가 신세였고 신 전무님은 생활의 굴레에 자유로운 바람 같은 분이셨다. 조 사장님은 참으로 성품이 따뜻하고 훌륭하신 분이다. 그분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늘 송구스럽다.
지금 사부님은 건강 때문에 화류계에서 은퇴하셨다. 그래서 주로 나 혼자 을지면옥에 들러 쓸쓸히 돼지고기 편육 반 접시와 물냉면을 시켜 놓고 소주를 홀짝거리며 그때를 회상한다. 캬, 소주가 쓰면서 달다. 좋았던 그 시절, 맛있던 그 추억이 그립다.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그때 그 모습들이 아른거린다. 사부님, 만수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