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s Notes

작가노트

만화방창 萬化方暢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그것들과 더불어 놀 줄도 알아야지.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거든. 
놀자, 한바탕 징하게 놀아보자. 
즐거운 인생을 위하여!

언젠가는 빛나는 진주같이 되리라, 나도, 당신도... 

마흔일곱 살이 됐다. 손가락마다 붉고 노란 또는 푸른 색들을 묻혀가며 지낸 날들의 기억이 차가운 강물 위의 가녀린 갈대처럼 아스라하다. 돌이켜 보면 많은 시간을 잃기도 했고 또 얻기도 했다. 비틀려 나간 공간들 속에서도 가끔은 찬란히 피어 오른 민들레 꽃처럼 꿈결 같은 봄날도 있었다. 나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낯선 땅의 이방인처럼 나는 늦게까지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끝난 후에도 나는 더듬거렸고 또 병약했다. 

우리 가족은 대 식구였다. 몇 명이 있던가. 그들은 줄기차게 대문을 들락거렸고 식은 밥상은 늘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영희, 영옥 고모, 종한이 아저씨. 특히 그림을 좋아한 가족들이다. 왠지 난 그들의 그림을 사모했으며 흉내 내었다. 세상은 고요했지만 나는 마냥 많은 것을 그렸다. 서투른 말씨로는 도무지 애기할 수 없었던 나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서울사대부국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부끄러움이었다. 공립학교에 입학해서도 성적은 늘 바닥이었다. 공부도 싫었고 숙제 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6년 동안 숙제를 안 해가서 답임 선생님께 맞은 따귀가 이백 대 아니 삼백 대는 족히 넘을 것이다.

아랫도리를 벗겨 놓은 아이처럼 대부분 부끄러운 날들 속에서, 더러는 양귀비꽃 한 웅큼을 씹어 삼킨 것같이 환상적인 날들도 있었다. 외갓집 포천에서의 추억이 그것이다. 그때 나는 모았다. 안개 젖은 밤에 울어대는 햇빛과 엉겅퀴, 새벽 닭, 무서울 정도로 별이 많은 밤에 처마 끝에서 잡은 파란 새,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 한 손으로 오랑캐꽃을 꺾어 휘두르며 다른 한 손으로 잡은 모래부지, 빛나는 쏘가리, 망가진 안경을 걸친 듯한 염소… 그것들은 지난 시대의 위대한 흑백영화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내 정수리의 한복판에 문신을 한 듯 새겨져 있다.

그렇지만 나머지 서울에서의 생활은 줄곧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광희로, 인왕으로, 고은으로, 면목으로 여러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지만 친구를 갖지 못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도 그림 솜씨 때문에 때때로 야릇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결국 나는 특수 아동으로 정해져 방과 후 그림을 한 장씩 그려야만 귀가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하기 싫은 청소는 면제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스타일화 그리시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양장점을 하셨다) 그 옆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열심히 베끼기도 했다. 그 그림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풍경화라는 것은 훗날에야 알았다. 아버지는 늘 책을 보셨는데 그래서인지 나도 교과서는 아니지만 많은 책을 보게 되었다. 그 중 「로빈슨 크루소」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시튼 동물기」도 그랬고,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 듯 모를 듯 기이한 묘사를 숨죽이며 탐독한 기억도 있다. 시간이 흘러 1976년에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직후 나는 처음으로 동양화(요즘엔 한국화라고 한다)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대학의 전공으로까지 이어졌다.

한참 동안 먹을 간 뒤에 털이 긴 붓으로 화선지에 그리는 것이 처음엔 참으로 지루하였다. 하지만 사군자,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정물화, 추상화 등 거의 모든 동양화의 분야를 그리고 또 그렸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주로 남화적인 화풍으로 그렸는데 오늘날까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어쭙잖은 실력으로 허세를 부리기도 했으며 혼자서 몰래 절망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5.18 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많은 이들이 신념과 정의와 자유를 위해 절규할 때 나는 한 발 뒤에서 덤덤히 바라만 보았다. 가끔은 최루 가스 속에서 불끈 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런 것도 한다는 아웅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격정적인 순수함보다는 적당함 속에서 편안함을 선택하였다. “예술가는 어둠 속에서 진리라는 빛을 기다리는 파수꾼이다”라고 하이데거는 말했지만 내 작업의 지향점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의 작업실 불은 늘 밤 늦도록, 때로는 동이 틀 때까지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향한 불빛이 아니라 탐욕을 향한 이기주의의 낯빛이었다. 물론 그것을 인정한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대학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그 기간은 몹시 우울했고 뒷덜미에 창이 꽂힌 노루처럼 몸은 늘어졌으며 도시는 뚜껑을 닫은 가마솥 안같이 답답했다. 이방인의 소외감을 잊으려고 술에 취해 휘청거린 나날들…

다시 서울에 와서 또 몇 년이 흘러갔고 대학에서 3년간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지만 다 그만두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귀찮았기 때문이고 또한 학교에서 월급 받는 것보다 그림을 팔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의 생활은 초라했다. 멋지게 예술을 토해낸 것 같아 우쭐거려도 봤지만 대개는 타인에겐 하찮은 잡동사니일 뿐. 그런 줄도 모르고 보물인 양 끌어안고 나만의 기숙한 골방 속에 처박혀 있었으니! 도취와 광기의 연속이었다. 천재는 창조의 순간을 체험한 자. 그들은 자기 몸이 파멸하는 한계점까지 힘을 내서 소모했고 자유와 진실에 순종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내가 해 왔던 작업이라는 것은 모방과 또 모방의 연속이었고, 몽상에 빠지거나 도취에 젖어 진실한 창조 행위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 자신과 내가 그린 그림과의 사이에 어떤 벽이 있어 왔고 야심적이라든지 아까워할 나만의 기둥을 갖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마흔일곱 살이라는 나이는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텐데, 반예술적인 성향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의미가 새겨져 있는 그런 작품 세계로 변신해야 할 텐데… 그것은 영원한 꿈일 뿐이며 신성한 비밀의 그림자로만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깨닫고 있다. 나를 인도하는 별은 놓치지 말고 거기에 내 운명을 맡겨 찬란하고도 감미로운 놀라움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는 빛나는 진주같이 되리라.